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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독서 감상문

김채림

2023-01-04

212

톨스토이와 더불어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인간 내면에 대한 깊은 성찰로 근대문학에 새로운 문을 연 도스토예프스키. 그를 대표하는 작품은 최고의 히트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죄와 벌이다. 특히 죄와 벌은 19세기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한 사실주의와 인간의 내면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중심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중 백미로 일컬어진다.
1866년 러시아 통보에 연재 된 작품으로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이야기를 처음 구상할 땐 그가 시베리아의 유형지에 있을 때였다. 나는 작가들, 특히 사실주의를 기조로 한 작품들은 작가의 경험과 관찰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미리 그들에 대해 공부하는 경향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와 같은 것은 시베리아에서 유형을 보낸다는 것과 가난과 어려움을 극복하며 열심히 사는 여성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라스콜리니코프와 여러 가지로 닮아있고, 자신의 경험을 녹여 심혈을 기울여 구성했다.
실제로 이 소설을 집필했을 당시인 1865년은 농노 해방 이후, 러시아 사회를 엄습한 경제 공황이 극심했을 때였다. 금융 위기로 길거리에 거지들이 넘쳐나고 겨우 거지를 모면한 서민들의 삶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정도다. 몇 달 째, 하숙비를 밀려 먹을 것도 없는 라스콜리니코프나, 사랑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자신에게 입지를 마련해 줄 남편감을 찾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여동생 두냐, 그리고 가족을 책임지기 위해 거리로 내몰린 어린 소냐가 그 참담한 상황을 현실적이고 충격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소설을 집필하기 전 편집자에게 ‘이 책은 범죄자의 심리적 보고서입니다. 소설은 현대(당시의), 그것도 금년에 일어난 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라고 하고 뒤에는 소설의 해설을 덧붙인다. 과연 심리 보고서라고 할 만큼 주인공의 심리와 행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결국 주인공의 행동을 대체적으로 모두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마지막은 종교와 사랑이라는 인류애적인 이야기를 결말로 하며 현실적인 보고서와는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다.
첫 이야기의 시작은 가난한 청년 라스콜리니코프의 일상이다. 가난으로 인해 하숙비를 밀린지 오래되었고, 대학교 공부도 계속 할 수 없었다. 신문물을 공부하는 총명한 학생이었지만, 빈곤으로 인해 건강도 잃고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시간만 축내는 사람이다. 그는 조소를 자주 띄우고, 친절하지 않으며 자주 화를 낸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사회에 나가 자신의 위치에서 돈을 벌고 인정받으려 했던 인생 계획은 쓸모없어진지 오래기에 그의 이런 만무방 같은 행동이 크게 제재를 받지는 않는다. 그는 ‘어떤 계획’을 실행시키기 위해 생각하고 넋을 빠뜨리기도 하는데 나는 그가 도끼를 집어든 다음에야 그것이 살인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았다. 그의 무의식을 묘사할 땐 구체적이지 않았고 그도 자신이 여동생이 돈을 가진 남자와 결혼한다는 일만 아니라면 그 의지를 관철시키기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도 꽤 모순인데, 자신은 돈벌이는 제대로 하지 않고 공부도 하지 않고,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어머니의 연금을 빌려 쓴다. 그러면서 동생이 막상 자신을 위해 가정교사로 희생하는 것도 모자라 형편없는 사내로 생각되지만 돈은 있기에 결혼을 결심하는 것을 나무라는 것이 진정한 오누이의 사랑인지, 그저 자격지심인지는 알 수 없다. 가족이 자신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는 상관없이 그런 것 필요 없으니 굶어죽겠다고 매몰차게 거절만 하는 것이 답은 아닐 텐데 주인공은 그 부분에 대해서 깨달음이 부족하다. 아무튼 동생의 결혼 소식을 알리는 편지에 분노가 치민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이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사상과 행동을 자기합리화하며 실행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범죄에 관해서 논문을 써서 잡지에 게재할 만큼 범죄자에 관해 연구해 온 사람이다. 다만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상은 도덕이나 사회적 관습, 법률에 의해선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은 반드시 모든 일로부터 용서받는다.’ 라는 것이었다. 러시아로 원정을 왔지만 결국 추위와 굶주림에 실패를 한 나폴레옹을 예로 들며, 수많은 학살과 침략을 저질렀지만 훌륭하다고 추앙받는 그는 모든 것을 용서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소수에 불과한, 심지어 그 평가도 종합적이지 않은 것을 가지고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논리에 갇혀버렸다. 근대에는 새로운 신문물을 배우기 시작한 젊은 청년들을 ‘지식인’이라고 일컫는 때다. 모두에게 주어지는 배움의 기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교육을 받은 이들은 모두 자신의 지식이 얼마나 훌륭하고 대단한 것인지를 생각하며 과장한다. 논리의 오류는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 관철하는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 역시 그런 무지한 청년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논리를 어떤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대단한 사유를 가진 소수의 사람이 아닌, 그저 자신에게 대입해버리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술집에서 들었던 대화 내용을 바탕으로 미망인이이자 자신도 가끔 물건을 맡겨 돈을 구하곤 했던 그 전당포의 노파는 살 가치도 없는 저질의 인간이며 그의 돈으로 훌륭한 일을 한다면 살인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 전당포의 노파가 라스콜리니코프와 물건을 맡긴 자들에게 자비를 베푼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매몰찼고, 돈을 밝히는 사람이었긴 했지만 그렇다고 죽음을 맞이할 죄를 지은 것도 아니며 라스콜리니코프가 살해할 권리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범죄에 대해 해박하다고 생각했기에 여러 가지 실수를 최소한 시키기 위해 준비를 하고, 노파를 찾아가 치밀한 계획으로 그녀를 죽였다. 물론 모든 범죄 행위는 실전이므로 계획되는 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노파로부터 고통 받고 있었던 불쌍한 여동생이 집에 나타나자 그는 생각지도 못한 등장에 놀라며 또 한 명의 아까운 목숨을 앗아간다. 심지어 그녀는 그에게 노파만큼의 추악한 짓거리를 한 적도 없으며 불쌍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라스콜리니코프 자신과 조금도 다를 게 없는 안타까운 삶을 살아가던 여자를 죽이고 말았다. 살인은 아무리 정당성을 두려고 해도 어려운데, 여동생의 살해처럼 우발적인 것은 라스콜리니코프의 이론이 옳다고 하더라도 잘못된 행동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라스콜리니코프는 예상치 못한 살인은 해서 당황하지만, 그것을 또 죄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는 노파의 트렁크에서 전당품 몇 개를 훔치고, 노파의 지갑도 가지고 오지만 그것을 열어보거나 얼 만큼의 값어치가 있는지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살인을 하고 나오자마자 당황하며 차라리 자수라도 해버릴까 생각한다. 내면에선 이런 고통이 나오고 외면으로도 열병을 앓는 수준이지만 그의 내면과 여러 가지 행동에는 계속해서 모순이 반복된다. 살인을 하고 난 뒤, 노파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걸리지 않기 위해 혹은 새로운 살인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숨지만 막상 여러 차례 자수를 결심하고, 살인을 했기에 평범한 인간이라면 겪을 불안과 초조의 고통을 당하면서도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일관한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정신병을 앓고 있지 않다면 상당히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애초에 그의 잘못된 논리마저 정신병으로 치부 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그가 사건의 빈틈을 좁히며 무죄임을 인증해가고, 동정심을 아는 청년이고, 한창 총명할 때에 논문의 논리를 완성했다는 점에서 그전엔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가 없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입신과 훌륭한 일을 위해 훔쳤던 그 물건들에 대해서도 살인 후엔 매력을 잃은 듯, 어딘가 버려버릴 생각을 한다. 강에 버릴까하다가 그것이 떠오를 것이 두려워 땅에 묻는다. 사건이 잠잠해지면 찾아오려고 묻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안녕을 고하고 묻는 것이다. 기껏 사람을 두 명이나 죽였고, 값비싼 물건도 아닌 그저 그런 것 몇 개만 훔쳐온 것도 아까운 일인데(표현하자면) 그것마저도 쓰지 않는 것이다. 주인공의 내면에선 막상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살인을 했지만 그 경험이 유쾌하지 않았던 것과 자신이 위험으로 내몰리는 것에 대해 지쳤는지도 모른다. 다른 쪽에선 여전히 자기가 한 짓은 죄가 아니다 라는 사실을 되뇐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을 모른다는 말을 이런 상황에도 적용 하는지 모르겠지만, 작가가 열심히 묘사하고 있는 주인공의 속내처럼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없었다. 한 가지 사건을 두고 여러 가지 감정을 교차시키며 고민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 담겼다고 생각한다.
경찰들은 피해자와 같은 건물에서 페인트칠을 하던 노동자에게 죄를 씌웠고, 진범에 대해선 전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범행에 대해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딱히 없는 판사 포르피리는 자신만의 수사기법인 범인의 감정을 떠보는 것으로 그를 단죄하기 위해 속력을 낸다. 둘은 총명한 두뇌와 자신들만의 신념을 가지고 여러 차례 심리싸움을 하지만 누구도 승자나 패자는 없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계속해서 대담하게 자신에게 죄를 씌울 것이면 지금 당장 호송하라고 하지만, 물증 없이 라스콜리니코프를 압박시켜 자백하게 만들어야 하는 포르피리 입장에선 눈치를 보며 주춤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 대화에서 그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자수를 강요하며 회유하는 정책을 쓰지만, 라스콜리니코프는 포르피리의 말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자신의 죄에 대한 연약함, 굴복에 패배를 인정하고 자수한 것이다. 적어도 그의 내면에 따르면 말이다. 포르피리는 이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라스콜리니코프의 죄를 꿰뚫어보면서도 그의 참회를 위해 신경 쓰는 사람이다. 그가 라스콜리니코프를 회유한 것은 그저 정의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번지르르한 말이 아니었다. 그는 라스콜리니코프가 꼭 속죄하길 바라고 광명을 찾길 바라는 의지를 담아 그를 회유했다. 나중에 포르피리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여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한 몇 안 되는 사람이 되며 자신의 온건한 성품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잘못된 논리로 사람을 두 명이나 죽이고도 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라스콜리니코프는 정말 천하의 없는 나쁜 인간인가? 살인이 정신병 때문이라고 한다면 조현병을 앓는 사이코패스인가? 두 가지의 질문 모두 확실히 아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논리에 오류는 가지고 있었고 수많은 내면의 감정에도 모순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적어도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땐 분노와 슬픔, 동정과 연민 등 다양한 감정을 표출했다. 사이코 패스도 아니며, 악의 근원도 아니다. 그는 우연히 만난 퇴역 관리 마르멜라도프가 참혹한 가정사를 얘기할 땐 동감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했다. 왜 그의 딸 소냐가 매춘부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이 퇴역 관리는 가족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월급을 탕진하며 술을 마셔야 하지 않는지 생각하며 그는 얼마 가지고 있지 않은 돈까지 주머니에서 꺼내 보태주었다. 연민의 행동을 보인 것이다. 특히 당시엔 평범한 계층의 사람이라면 저주할 매춘의 일을 하는 그녀에게도 나쁜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그의 오지랖은 이 정도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후에 마차에 치여 죽음을 맞는 마르멜라도프의 치료비와 장례비를 지원했다. 돈이 많아서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다. 그가 소지하고 있던 돈 역시 어머니가 어렵게 연금을 저당 잡혀 빌린 돈인데 그런 딱한 사정의 가족을 보고는 주머니에서 꺼내 모두 주었다. 노파에게 전당품의 가치를 얘기할 땐, 단돈 1루블도 심각했지만 안타까운 사연에는 돈의 가치가 끝으로 내려간다. 또 길거리에서 어린 소녀가 남자에게 겁탈 당한 차림새로 술에 취해있자 경관에게 돈을 줘서 그녀를 안전하게 집으로 데려달라고 부탁한다. 대학 시절엔 병을 앓는 동기를 돕고 반 년 이나 부양했던 사실과 그 친구가 죽자 그 노쇠한 부친까지 돌본 것, 화재가 난 건물에서 어린이 두 명을 구한 적이 있는 것 등이 나중에 모두 사실로 밝혀져 그가 자수하고 난 다음에도 형량을 크게 줄일 수 있는 보탬이 되었다.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도 없다는 사실과 함께 선하고 성실했던 청년의 인생이 왜 이토록 망가졌는지에 대한 사회의 책임도 묻고 있다. 애초에 작가가 이 주인공을 만들 때엔 실제 있는 일을 주제로 했지만 인물의 성격만큼은 자신과 비슷하게 설정했다. 그러므로 그처럼 큰 죄를 지어도 마땅히 연민의 감정을 받는다. 살인자임을 알면서도 그를 사랑하게 되는 소냐와 그를 지지해주는 어머니와 여동생 두냐, 그리고 그의 친구 라주미힌의 존재가 그 주장을 뒷받침한다. 작가는 대단한 이유도 없는 위험한 사상가에겐 주변에 좋은 사람들을 두며 위로했지만, 여동생 두냐를 탐하던 루진이나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비난을 아끼지 않는다. 루진은 앞서 언급한 여동생 두냐가 결혼하기로 약속했던 약혼자이며,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두냐를 향한 욕정에 눈이 멀어 아내를 죽이고(물증은 없지만), 자신의 속내를 숨기며 두냐에게 접근하는 남자다. 살인자보단 호색한에게 인색한 것이 작가의 개인적인 취향인지 러시아의 평범한 관습인지는 알 수 없다. 후에 루진은 라스콜리니코프와 가족의 사이를 갈라놓으려다 계획에 미끄러져 비난 받고,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권총 자살을 선택한 것으로 최후를 맞는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수를 한 것은 사건이 일어난 후 한 달이 넘은 일이다. 자신은 죄가 없다고 하면서 괴로워하고, 불안과 고독함에 소냐를 찾아가 모든 것을 고백하면서도 누군가 그 사실을 들었다고 생각하자 또 겁을 낸다. 이런 자신의 행동으로 이미 패배자임이 확실하기에 자수를 한다고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사실을 고백하지 못한다. 재판을 받을 때도 자수한 이유에 대해선 마음으로부터의 뉘우침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유형 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죄인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면 행복하겠다고 외치는 사람이었다. 소설 속에선 ‘그는 엄중히 자기비판을 해 보아도, 잔혹한 양심에 비추어보아도 특별히 무서운 죄를 발견할 수 없었고, 발견된 것은 단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실패뿐이었다.’ 라고 적혀있다. 마음으로부터의 뉘우침이란 자신의 실패에 대한 자기반성 이었을까? 자수는 했지만 광명은 찾지 못했다. 자신을 위해 시베리아까지 따라온 소냐에게도 그는 냉담했고, 죄수들에게선 따돌림을 당할 정도로 관계가 좋지 않았다.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시절의 삶으로 돌아갔다. 그가 바뀐 것은 소냐가 아파서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을 때다. 자신의 곁에 있어 늘 그 소중함을 잊었던 존재가 영영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고 나서야 그는 사랑의 힘을 회복했다. 분노와 조소만을 표현하던 남자 라스콜리니코프는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안았다. 소냐도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앞으로 남은 7년간의 유형생활은 희망과 기쁨으로 미래를 계획할 수 있을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당시 유럽의 신앙생활에는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독실한 믿음도 없었지만, 습관적인 믿음도 없었다. 그렇기에 하나님 앞에 참회하지도 않았고 소냐 때문에 억지로 성호를 그은 것이 전부였다. 땅에 입을 맞추는 동작을 하기는 했지만 진심으로 회개한 것이 아니므로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런 그가 사랑의 힘을 회복하자 복음서를 꺼내든다. 당장 펼쳐 읽지는 않았지만, 소냐의 감정과 소망이 이렇다면 자신도 마땅히 그런 감정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한다. 죄와 벌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난다. 앞서 설명했듯, 엄청난 신념과 논리를 가진 청년의 마지막이 사랑과 종교의 힘이라는 사실이 진부하기는 하다. 물론 진부한 만큼 설득력은 있다. 거의 200년 전에 가까운 이야기지만, 현대에 대입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우리의 삶과 밀접하다. 나는 개인의 일탈, 특히 범죄에 관해서 모두 사회의 문제로 취급하는 것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범죄가 사회 현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끔찍한 범죄와 잘못 된 논리를 통해 신앙과 도덕성 회복을 기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한 마디로 감상평을 줄이자면 이렇게 하겠다. 인간의 내면은 복잡하다, 그래서 어느 방향으로든 그것이 선이든 악이든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