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항공대학교 미래교육혁신원

KAU 지식공유

나의 인생책

  1. KAU 지식공유
  2. 나의 인생책
항공인들과 공유하고 싶은 잊지 못할 나의 독서 경험, 나의 인생 책을 추천해주세요! 항공인들과 공유하고 싶은 잊지 못할 나의 독서 경험, 나의 인생 책을 추천해주세요!


타인의 추위 위에 세워진 안락함, 그 위태로운 온기에 대하여

이동하

2026-01-15

20

박완서,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1』를 읽고...


누구나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찰나의 순간'이 있습니다. 그 짧은 선택이 평생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면, 그리고 그 선택이 나의 가장 비겁한 본성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우리는 남은 생을 어떻게 버텨낼 수 있을까요? 이 소설은 바로 그 지독하고도 서글픈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1. 놓아버린 손, 갈라진 두 세계
이야기는 한국전쟁의 참혹함이 극에 달했던 1.4 후퇴의 피난길에서 시작됩니다. 주인공 수영은 어린 여동생 수인의 손을 잡고 인파 속을 헤치고 나갑니다. 하지만 춥고, 배고프고, 동생이라는 존재가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던 어느 결정적인 순간, 수영은 동생의 손을 '놓아버립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놓은 것이 아니라 '버린 것'에 가깝습니다.
이 짧은 사건을 기점으로 두 자매의 인생은 극명하게 갈립니다. 언니 수영은 죄책감을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고, 누구보다 우아하고 완벽한 중산층의 삶을 일구어 나갑니다. 반면, 버려진 동생 수인은 '오목이'라는 이름으로 고아원에서 자라며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게 되죠. 소설의 전반부인 시즌 1은 이처럼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두 줄기가 얼마나 처절하게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지를 세밀하게 추적합니다.

2. 가해자가 된 주인공, 그 낯익은 이기심
이 소설이 독보적인 이유는 주인공 수영을 단순히 평면적인 악인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수영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혹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평범한 속물'입니다. 동생을 잃어버렸다고 거짓말하며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의 안락한 가정을 지키기 위해 동생의 존재를 외면하려 애쓰는 그녀의 심리 묘사는 소름 돋을 정도로 정교합니다.
작가는 수영의 입을 빌려 인간의 '자기 합리화'가 얼마나 견고한지를 보여줍니다. "그땐 어쩔 수 없었어", "지금 도와줘봤자 서로 불행해질 뿐이야"라는 변명들. 독자는 수영을 비난하다가도, 어느덧 "만약 나라면 저 상황에서 끝까지 손을 잡고 있었을까?"라는 서늘한 질문 앞에 멈춰 서게 됩니다.

3. 역설적인 제목이 주는 여운
소설의 제목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는 지독한 역설입니다. 수영이 누렸던 따뜻한 방과 안락한 옷들은, 사실 동생 수인이 겪어야 했던 혹독한 추위와 맞바꾼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수영의 '따뜻함'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위태로운 기반 위에 세워진 것인지를 끈질기게 파헤치며, 우리 사회가 가진 허위의식을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비판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수인의 억척스러운 생명력을 통해 인간이 가진 본연의 건강함을 보여주기도 하고, 끊어내려 해도 끊어지지 않는 '혈연'이라는 지독한 굴레를 통해 가족의 의미를 다시 묻게 하죠.


저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몇 번이나 책장을 덮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작가가 무서울 정도로 정교하게 파헤친 수영의 그 비겁한 속마음들이 저에게도 결코 낯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은 우리 안에 숨겨진 '작은 수영'을 기어코 끄집어내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얻은 나의 평온함이 과연 진짜인지 묻습니다. 그 질문이 아프고 불편할지라도, 한 번쯤은 꼭 마주해야 할 우리 자신의 민낯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래전 쓰인 소설이라는 편견이 무색할 정도로, 사람의 심장을 꿰뚫는 문장들은 날카롭고 생생합니다. 1950년대라는 먼 과거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2026년을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 역시 여전히 누군가를 시기하고, 자신의 안위만을 계산하며 살아가고 있기에 이 이야기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작가의 시선은 차갑고 냉정해 보이지만, 그 끝에는 결국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이 서려 있습니다. 수영이 놓아버린 그 손을 우리가 다시 잡을 수 있을지, 아니면 그 온기를 포기하지 못한 채 살아갈 것인지... 그 해답을 찾아가는 이 여정에 여러분도 함께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